레이블이 시사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시사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5년 5월 10일 토요일

인용

 속죄의 길을 걷는 베르고글리오, 내려옴으로써 길을 찾은 베네딕토 16세. 우리는 죄를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고, 내려오는 순간 다시는 올라갈 방법이 없을 것이라 믿는다. 끊임없는 정당화와 합리화, 타협은 그러한 확신에 기인하는 법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두 교황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또 다른 길이 열려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길은 속죄 없는 타협, 자리를 지키는 탐욕이 향하게 될 길보다 더욱 밝고 넓고 깊을 것이다.


source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6/0000051616

2017년 7월 3일 월요일

인간성은 결코 혼자서 획득할 수 없으며, 공중에게 주어진 누군가의 작업에 의해서도 획득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삶과 인격을 ‘공공역역으로의 모험‘에 내던진 사람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이러한 모험은 오로지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출처: https://leeyoon.com/2013/12/14/%EC%95%84%EB%A0%8C%ED%8A%B8-%EC%A0%95%EC%B9%98%EC%9D%98-%EC%A1%B4%EC%9E%AC-%EC%9D%B4%EC%9C%A0%EB%8A%94-%EC%9E%90%EC%9C%A0%EB%8B%A4/

2014년 11월 6일 목요일

[펌글] 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3 -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中


인간과 자연이 같은가 다른가를 묻는 질문은 어쩌면 어리석은 것일 수도 있다. 왜냐
하면 편견과 오만을 버리고 자연을 바라본다면 인간도 수많은 자연 생물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전호근(성균관대 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강사)

동양철학에서 나타나는 세계관은 서양의 그것 못지 않게 다양하다. 하지만 예외에
속하는 몇몇 철학자들을 제외하며 그 속에는 일관된 흐름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천인합일로 표현되는,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사유 형태의 전개이다. 멀리는 신화

세계관에서 시작하여 고대의 제자백가사상, 중세적 질서의 정당성을 대변했던
주자학은 물론이고, 가까이로는 근세의 양명학에 이르기까지 동양사상의 기저에는
자연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의식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른바 동양의
사상가라면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자연과 인간을
아우를 수 있는 통일적인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태도야말로 동양적 세계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 이와 같은 사유가 일반화될 수 있었던 원인은 동양인들이
마주했던 자연과 서양인들의 그것이 구체적으로 뚜렷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무시할 수 없다.
이를테면 서양문명의 발상지라 할 나일 강은 주기적으로 범람함으로써 일정 기간
동안은 비옥한 토지를 제공해 준다. 또 그리스 문명을 탄생시켰던 지중해의 기후는
온난할 뿐만 아니라 극심한 변화도 드물었다. 하지만 중국 문명의 발상지인 황하의
범람은 일정한 주기가 없다. 더욱이 대륙의 내부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은 모든 것을
황색으로 물들이고 수시로 한발이라는 대재앙을 몰고 온다. 곧 서양인들이 마주한
자연은 인간이 쉽게 대처하고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온순했던 반면, 동양의 자연은
인간의 저항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변화가 심했기 때문에 자연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자연을 이용하려는 의지보다는 오히려 거부할 수 없는 섭리로 인식하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인간 중심적
사고보다 자연 중심적 사고가 일반화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곧 동양에서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식의 오만함 따위는 보편화되기 어려운 명제일 수밖에 없
다. 



출처: http://cluster1.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GCB7&fldid=QFs6&datanum=4&openArticle=true&docid=1GCB7QFs6420130810185040

2014년 10월 9일 목요일

설시(舌詩)


'全唐詩'에는 풍도가 지은 舌詩(설시)라는 시가 실려 있다. 

口是禍之門(구시화지문)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 
舌是斬身刀(설시참신도)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로다 
閉口深藏舌(폐구심장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安身處處牢(안신처처뢰) 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하리라 


 출처: http://peerhs.com.ne.kr/gosa/ga55.html

2013년 12월 13일 금요일

[펌] 고대 주현우씨의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

1. 어제 불과 하루만의 파업으로 수천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다른 요구도 아닌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 이유만으로 4,213명이 직위해제된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본인이 사회적 합의 없이는 추진하지 않겠다던 그 민영화에 반대했다는 구실로 징계라니. 과거 전태일 청년이 스스로 몸에 불을 놓아 치켜들었던 '노동법'에도 "파업권"이 없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정부와 자본에 저항한 파업은 모두 불법이라 규정되니까요. 수차례 불거진 부정선거의혹,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이란 초유의 사태에도, 대통령의 탄핵소추권을 가진 국회의 국회의원이 '사퇴하라'고 말 한 마디 한 죄로 제명이 운운되는 지금이 과연 21세기가 맞는지 의문입니다.

시골 마을에는 고압 송전탑이 들어서 주민이 음독자살을 하고, 자본과 경영진의 '먹튀'에 저항한 죄로 해고노동자에게 수십억의 벌금과 징역이 떨어지고, 안정된 일자리를 달라하니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비정규직을 내놓은 하수상한 시절에 어찌 모두들 안녕하신지 모르겠습니다!

2. 88만원 세대라 일컬어지는 우리들을 두고 세상은 가난도 모르고 자란 풍족한 세대, 정치도 경제도 세상물정도 모르는 세대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1997~98년도 IMF 이후 영문도 모른 채 맞벌이로 빈 집을 지키고, 매 수능을 전후하여 자살하는 적잖은 학생들에 대해 침묵하길, 무관심하길 강요받은 것이 우리 세대 아니었나요? 우리는 정치와 경제에 무관심한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단 한 번이라도 그것들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목소리내길 종용받지도 허락받지도 않았기에, 그렇게 살아도 별 탈 없으리라 믿어온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조차 없게 됐습니다. 앞서 말한 그 세상이 내가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요.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가, 혹시 '정치적 무관심'이란 자기합리화 뒤로 물러나 계신 건 아닌지 여쭐 뿐입니다. 만일 안녕하지 못하다면 소리쳐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이 무슨 내용이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

출처: 경향신문
〈김여란 기자 peel@kyunghyang.com〉

http://media.daum.net/society/newsview?newsid=20131212192709564

2011년 8월 30일 화요일

허블 딥 필드

사우스 허블 딥 필드보다는 허블 울트라 딥 필드(Hubble Ultra Deep Field)라 부르는게 맞습니다.
이는 화로자리 부분에 있는 조그만 영역을 찍은 사진인데요.
허블 우주 망원경이 2003년 9월 3일부터 2004년 1월 16일까지 찍은 사진들을 조합한 것입니다.
이 사진은 지금까지 찍은 어떤 가시광 영상보다도 먼 곳을 포착하고 있고,
대략 130억 년 전 우주 탄생 후 얼마 되지 않은 뒤 태어난 천체들을 담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허블 딥 필드(영어: Hubble Deep Field)는 큰곰자리에 있는 100억 광년 이상 떨어진 은하들이 있는
작은 영역을 말합니다. 타 항성의 빛에 간섭이 최소한인 자리에서 찍은 것을 말하는건데요.
크기는 2'.5 정도, 즉 천구의 2,800만 분의 1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허블 우주 망원경이 딥 필드 기법으로 포착하여 관측하였으며,
허블 딥 필드를 관측하기 위해 1995년 12월 18일 부터 1995년 12월 28일까지 사진을 300장 찍었고,
이 사진들을 겹친것을 말합니다.

출처; 네이트 지식 편집

2011년 4월 23일 토요일

네가지 외도

선禪에서는 네가지 외도에 대해서 말한다.
상견(常見)외도, 단견(斷見)외도, 변견(邊見)외도, 희론(戱論)외도가 그것이다.

그것이 상견외도인가?
나 자신이 항상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대부분의 세상사람들이 그렇게 신념하면서 삶을 꾸려가고 있다.

무엇이 단견외도인가?
나 자신이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성인의 가르침이나 깨달은 이들의 말과 글을 잘못 이해하는데서 오는 착각이며 미혹인 것이다.

무엇이 변견외도인가?
나 자신이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변견이란 곧 변두리를 말한다.
변두리라는 것은 곧 오락가락하다는 의미이다. 앞의 두 견해를 절충해서 살 궁리를 하는 것이다.

무엇이 희론외도인가?
나 자신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희론이란 말장난이라는 의미이다.

출처: http://taospace.net/technote6/board.php?board=NEWVISION&command=body&no=60&PHPSESSID=8a4d9a6901034b604861e05576d77b65

2010년 5월 2일 일요일

기고글 인용.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74372&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1

결론부터 말해 보자. 흔히 '질문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을 한다. 이 상황에 정확히 부합하는 말이다. '이런 거 왜 못 만드느냐'고 묻는 것은 질문자가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백하는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만들자'고 말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모두 지도자들이다. 조직에서 가장 강한 권력과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사람들 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거 왜 못 만드냐'고 묻는 지도자가 많을수록 그걸 만들어 낼 가능성은 낮아진다.



두 번째는 이런 질문을 태연히 던질 수 있게 하는 위계적 사회구조다. 위계 사회에서 '왜 못 만드냐'는 말은 질문이 아니라, 질타이고 추궁이며 명령이다. 여기서 자신의 책임은 빠져있다. (자기는 방법을 모르지만) '어떻게든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고 있을 따름이다.



위계적인 조직일수록 소통은 막혀있기 마련이다. 이런 경직된 소통구조 속에서 창의력이 꽃 피기를 바라는 것은 '우린 왜 못 만드냐'는 질문만큼이나 어리석다. 그런 질문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 조직이 창의적인 제품을 만들 수 없을만큼 위계적이고 경직되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게 두 번째 답이다.

출처 : 우리는 '이런 거' 왜 못 만드냐고? - 오마이뉴스

~정말 후련하군요.

2009년 11월 12일 목요일

많이 바뀌는 야구경기 명칭

아시아 야구게임의 명칭 변화(World Baseball Classic과는 관계가 없다.)

◈ 코나미컵 : 초기 명칭으로 일본 후원사의 이름을 땄다. 한일 경기로만 이루워진 것으로 기억한다.
◈ 아시아시리즈 : 후원사가 빠지고 대만과 중국의 우승팀이 합류했다. 2008년, 그러니까 작년까지 이렇게 불리웠다.
◈ 한일 클럽챔피언십 : 다시 한일 우승팀끼리 경기하게 됐다. 또한 한번의 경기로 끝난다.

내일 한시에 열린다 기아의 우승을 기원하며...........

2009년 11월 4일 수요일

2009년 1월 6일 화요일

한국에 있어서의 여자의 선택

여자에 있어서의 결혼의 문제는 한국 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문제는 사실 이 spread를 좁게 한다.

사실 여권을 주장하고 이성적 삶을 추구한다면 독신을 권장한다.
사회화된 여성이 또다시 -즉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정도 -결혼을 꿈꾸는 건
어찌보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애착이다.

70년대 생의 여성들은 -이건 통계적 이야기다.- 일의 즐거움과 사회적 성취를 알게 되었다.
당연히 늦은 나이에도 독신이어서 골드미스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 현실이다.

대신 적당한 미모와 적당한 사회적 타협으로 시집을 간 친구들은 나름의 조그마한 헤게모니를 갖으려 싸운다. 문제는 이들의 영향력이 자녀의 성장과 함께 추락한다는 거다.

골드미스 역시 주위를 둘러보는 습성 때문에, 또 이제까지 있었던 적이 없는 자신의 lifestyle 을
사회적으로 공인받지 못한 데서 오는 우울이다.

인간은 이제껏 있지 않았던 걸 사용하면서 진보해 왔다.
불을 쓰고 산업화를 이용하여 자본을 만들고, 마이너들이 역사의 좌초에서 도전과 응전으로
메이져의 길을 딲았다.

당신이 결혼하지 않는 다고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다.
독신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했을 뿐이다.

카페에 일인용 테이블이 설치되길 주장하라!
괜히 이성친구를 만들려 노력하지 말아라!
부장이 되는 걸 목표로 삶아라!
또 회의가 들면 갓 애를 놓은 친구 집에 인사가라. 당신의 삶이 더 값질 수있다는 걸 배운다.

인용

  속죄의 길을 걷는 베르고글리오, 내려옴으로써 길을 찾은 베네딕토 16세. 우리는 죄를 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고, 내려오는 순간 다시는 올라갈 방법이 없을 것이라 믿는다. 끊임없는 정당화와 합리화, 타협은 그러한 확신에 기인하는 법이...